다같이多가치

삼일독립선언절 명칭변경운동

3.1독립선언은 민주공화국으로 가는 획기적 정치혁명
국경일 중 ‘삼일절’만 명칭속에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아

우리가 별 생각 없이 ‘3.1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는 1919년 3월 1일의 독립선언과 전국적인 항일 만세시위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것은 당시 경향 각지 각계각층의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자주독립의 의지와 능력을 내외에 적극 표출했던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 민족주의 혁명이었다. 또한 이 혁명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비록 임시정부 형태였지만 민주공화국으로 시발되게 했던 대단히 획기적인 정치혁명이었다.(박은식, 2008;조소앙, 1979;안재홍, 1983;홍이섭, 1969;이현희, 1979;최창규, 1979;신용하, 2019;백영서, 2019;강경선, 2017) 당대에 이 혁명을 모색하고 성사시켰던 민족지도자들은 “홍익인간”의 이념이 구현되는 “대한국”에의 꿈을 간직한 채 기독교 및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등 서양 근대의 정치사상을 적극 수용하고 전후의 국제정세를 최대한 파악하고 활용하여 우리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끈질기게 추구했고 이에 동조했던 내외 방방곡곡의 개인들은 독립만세 시위에 적극 동참했다.(정윤재, 2022). 5월말까지 지속된 이 만세시위에는 전국의 212개 시·군에서 약 200만 명이 참여하여 최소 7,500여명이 희생당하고, 4만7000여명이 구금당했다. 만세시위 현장을 취재했던 영국 기자 매킨지(Frederick A. Mackenzie, 1869-1931)는 “민족대표 33인은 순국(殉國)의 길을 택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중벌을 면할 수 없고, 최악의 경우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망상에 젖은 것이 아니었다”고 전하면서 당시 한민족 대표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압제와 중세기적인 군국주의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와 평화를 약속한 땅으로 나갈 길을 찾기 위해 투쟁하는 새로운 아시아의 외침이었다”(매킨지, 2018: 212-213)고 평가했다. 그리고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손 문(孫文, 1866-1925)은 3.1혁명을 한민족이 일제에 의해 강점당하여 식민지로 전락한 지 10년도 못되어 거족적 저항과 봉기로 성사시켰던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그것은 사실상 “대혁명”이었다고 평가했다.(임형택, 2019:18-19)

그리고 1897년 독립협회운동이후 1907년 대한신민회, 1912년 동제사, 1913년 대한인국민회, 1918년 신한청년당, 1919년 2.8독립선언 등을 거쳐 3.1독립혁명의 성취로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가 민주공화국으로 출범할 때까지 세계각지에서 계몽교육과 독립투쟁에 적극 참여했던 서재필, 이상재, 안창호, 이승만, 신규식, 여운형, 조소앙, 손병희, 한용운, 이승훈 등 주요 개인들의 삶과 향동을 다시 살필 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성격의 혁명이었다.(정윤재, 2022)

첫째, 3.1혁명은 구미의 근대적 정치사상들에 입각한 독립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추구했던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이었다. 즉, 독립협회운동을 계기로 기독교문명권인 근대 구미의 자유주의와 민주공화주의에 의해 개명되었던 내외의 민족지도자들이 주도했던 사실, 이렇게 행동했던 많은 개인들이 중국 신해혁명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 선언에 고무되어 자발적으로 나서서 각자의 위치와 선택에 따라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행동했던 사실, 이 과정에서 내외각지의 주도적인 개인들과 여러 형태의 자생적 결사체들이 상호 소통하고 연대했던 사실, 개명된 학생들과 청년들의 자발적이고 조직적인 궐기와 연락활동, 윤희순, 국채보상운동의 서씨부인과 기녀들, 김마리아, 황에스더, 유관순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성들이 항일독립활동에의 평등한 참여를 주장하고 적극 행동했던 사실, 향촌지역의 유생 및 지주들의 합세로 전국적이고 전 계층적인 참여가 성사되었던 사실, 3.1독립선언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상해‧서울 등 세 지역의 임시정부들이 상호 소통하며 마침내 통합정부를 성사시켰던 사실, 상해 통합 임시정부가, 당시 자유주의적 민주공화국으로서 인도주의적 가치지향을 보인 미국과의 관계에 유의하면서 다차원적 독립외교를 실행했던 사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행동들이 모두 각계각층 개인들의 근대적 개명과 자유의지로 추동되었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에도 불구하고 중단되지 않고 세대를 이어가며 지속되었던 사실 등을 고려할 때 3.1혁명은 근대 구미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준거로 독립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지향했던 한민족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이었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1919년 3.1혁명까지의 25년은 분열과 쇠망만으로 점철된 불행한 시기였다기보다 오히려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미 근대국가들과 동일한 정치적 비전을 채용하고 일제의 강압과 무단통치에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희망과 도전의 시기”로 규정하는 것이 적실하다.

둘째, 3.1혁명이 바로 직전의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배제하고 공산계급혁명으로 귀결되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성공 이후 레닌이 지원했던 식민지 해방운동에 기대를 걸었던 이동휘는 당대를 “민족경쟁”시대로 인식하고 계급투쟁보다는 반제국주의적 민족투쟁 차원에서 계몽구국 활동과 임시정부 통합과정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3.1혁명의 모색과 성취과정을 주도했던 절대다수의 민족지도자들은 구미의 근대 정치사상에 의해 개명되었고 미국 등 자유주의적 선진국가들의 경험을 발전모델로 삼았으며 중국 신해혁명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 선언을 정치적 독립의 기회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3.1혁명을 근대 구미의 자유주의적 시민혁명과 같은 정치적 기획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즉, 3.1혁명은 피압박 약소민족 중 하나였던 한민족의 각 구성원들이 계급이 아닌 민족을 정치사회적 변화와 발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민족 본래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근대 구미의 천부인권론과 국민주권론 그리고 민주공화주의 등 새로운 정치사상들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그들 각자가 스스로 결단하고 분투하며 민족의 주체성과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시도했던 획기적인 정치혁명이었다. 이런 점에서, 3.1혁명은 사실상 잔잔한 “호수”라기 보다 오히려 좔좔좔 크게 소리 내며 휘돌아 흐르면서 대하(大河)의 물줄기를 바꾸는 커다란 “여울[灘]”과 같은 대사건이었다고 새롭게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3.1혁명의 이러한 정치적 성격과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도세력이 공산세력과 분리되어 자유주의적 전통을 유지했던 사실(신용하, 2010:10-89), 그리고 국내 항일 민족운동의 핵심세력은 민족독립 없는 사해동포주의와 민족문화를 부정하는 국제공산주의세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거부해 왔던 사실(정윤재, 2005: 17-58)을 상기할 때, 우리는 3.1혁명을 성취하고 일제치하를 지내는 동안 이미 “막스주의가 독재와 제국주의적 침략을 옹호하는 또 하나의 사상으로서 근본적으로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 이데올로기”(이홍구, 1996: 24)임을 이미 체험적으로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3.1혁명을 모색하고 이끌었던 사람들은 양반과 평민 및 천민 등 다양한 신분의 개인들 이었다. 이는 신분이나 직업에 의해 별 차이를 보이지 않고 대부분의 민족구성원들이 당시 민족이 처한 정치적 위기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그 해결을 위해 적극 행동했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각종 행실에서 절제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며, 궂은일에 먼저 나서는 등 여러 “행동양식 가치들”을 솔선하여 실천함으로써 주변으로부터 존경과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시대 흐름에 따라 정치적 독립과 주권자인 개인들의 자유와 행복이 보장되는 민주공화국의 건설 등 근대적 “목적가치”를 추구했다. 또한 이들은 비록 충분치는 못했으나 서로 소통하고 의논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위한 절차에 성실했고, 필요한 제도마련에 긍정적이었다. 이들은 상호 조직적 연계도 일정한 수준에서 원활하게 유지하며 부단한 계몽과 저항으로 당시 우리 민족이 직면했던 일제 식민지라는 총체적 속박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진력했다.

3.1혁명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보여진 이 같은 면모들과 이에 참여했던 여러 개인들의 정치적 성향을 고려할 때, 이들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처음으로 “민족적 자유주의”(이홍구, 1996:35)에 입각하여 비록 임시정부였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성립을 위해 노력했던 정치적 선구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오늘의 대한민국이 의회민주주의적 공론형성과정을 통해 극단주의적 도전을 극복하며 각종 정책혁신과 점진적 개혁을 끈질기게 실천함으로써 자유주의적 민주공화국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발전시켜 오고 있는 사실은 현재 주변의 일본, 북한, 중국, 러시아가 서로 이념과 국체를 달리하면서 사실상 모두 비자유주의적(non-liveralist) 정치체제로 남아있는 현실과 매우 대조적이다.

넷째, 3.1혁명을 모색하고 성취했던 개인들은 일제에 의해 강요된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거부했지만 패망한 한민족의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정신문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한민족 역사와 전통 속의 장점과 특징을 밝히거나 새롭게 해석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북돋우며 기존 향촌사회의 민중들과 소통하고 연대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근대적인 의식개혁과 그러한 경험의 축적 및 사회적 확산을 통해 정치적 독립을 추구했고, 장기적으로는 한민족 각 개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자유문명국”의 건설을 꿈꾸었다. 즉, 이들은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투쟁을 지속하는 동안 이미 공유하고 있던 전통적인 보편가치들을 성급하게 버리지 않고 오히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로 재평가하고 되살려 그것이 민주공화국의 건설로 구현되는 “대한국”에의 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전통적 생활 속에 축적된 문화와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근대 구미의 기독교와 정치적인 가치들을 개방적으로 수용하고 새로운 국제환경과 기회를 적극 활용하며 정치적 독립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일제의 강압으로 유명무실해진 대한제국 황실 자체를 공산주의적 반봉건투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속박 당하던 황실을 독립의식 고취와 투쟁의 상징으로 활용했다. 이들은 또한 신분차별이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러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의 급진적 해결보다는 자조자립, 실용주의, 자아혁신을 통한 정신적, 물질적 실력양성, 그리고 점진개혁을 선호하고 실천해 왔다. 3.1혁명의 모색과 성취과정에 참여했던 개인들이 보여준 이 같은 면모들은, 그들이 일상적 생각과 행동에서 자유주의나 민족주의가 지향하는 “진보의 이념을 버리지 않으면서 민족독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끈질기게 추구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정상적 사회발전은 혁명이 아닌 진화적 발전을 통해 달성”되며 “문명 그 자체는 최소한 얼마만큼의 사회적 연속성을 유지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버크(Edmund Burke)의 “보수주의”(왓킨스, 1997:94)와 상통하는 바가 많다.

다섯째,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는 동학농민전쟁으로 고양된 자주적 항일 민족의식과 독립협회운동 및 대한신민회 결사 이래 채용된 구미의 근대 정치사상들로 촉발된 민주공화주의적 개명이 점차 확산되면서 실행된 애국계몽운동과 3.1혁명의 정치적 소산이었다. 또한 그것은 상해 등 중국 각지, 서울 등 국내 각지, 샌프란시스코 등 미주각지,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 각지, 동경 등 일본 각지에서우의 항일 계몽구국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당대 한국인들의 독립정신과 상호 신뢰 속에 지속된 소통과 연대협력의 민족적 에너지가 집약된 결과였다. 이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는 신채호의 표현을 빌면 당시 한민족 구성원들의 뜻과 정성이 모아진 “정신상(精神上) 국가”(신채호, 1998:160-161)였다. 일부에서 이 상해 임시정부가 “형식상(形式上) 국가”의 요건을 완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온전한 국가의 출범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는 상술한 바와 같은 역사적 연원을 가진 정치조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이 구현된 분명한 조직적 실체로서 나무의 줄기 및 잎과 함께 분명히 생생하게 존재하는 뿌리와 같은 기관이었다. 그래서 이 통합 임시정부는 비록 그 형식적 한계가 없지 않았지만, 우리도 정치적으로 독립된 민족임을 의식적으로 확인하면서 어두운 일제 치하를 견디고 저항할 수 있게 했던 “정신적 대표기관”(신용하, 2021:239)이었다. 이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는 사실상의 망명정부로 2차 대전 종전 시까지 존속하면서 내외 각지의 한국민들이 전통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견지하고 독립자금을 내거나 다양한 항일투쟁에 가담하는 등 여러 형태의 근대적 애국행동에 나서게 하는 희망과 결속의 구심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3.1혁명이란 호칭을 포함하여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아직도 분산되어 있고 그에 대한 기념실태도 허술하기 짝이 없고 겉치레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다양한 계층과 직업의 우리 민족구성원들이 각자 자유의지로 정치적 독립을 위해 저항하고 투쟁했던 독립혁명이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분단 이후의 왜곡된 이념갈등과 냉전 상황 때문인지 대체로 사람들은 혁명이란 용어 사용을 꺼렸다. 그리고 보통 ‘교양 있고 현명한’ 사람들은 ‘3.1운동’이란 무난한 용어를 그대로 쓰며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며 지내 왔던 것으로도 보인다. 또 오늘날 정치인이라면 ‘보수’나 ‘진보’를 불문하고 모두 대한민국이 3.1혁명의 정신과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정작 그렇게 중요한 3.1혁명과 그 지도자들에 대한 생각이 제각각이고, 대개는 3.1혁명과 그 지도자들을 왜 기리고 계승해야 하는지에 대해 길게 말하기를 꺼린다. 그리고 전국 곳곳에 3.1혁명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지만 독립선언서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게 설계된 곳도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에 겨우 더부살이로 설치된 3.1혁명 기념조형물들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낡고 때가 끼어 외면당하기 일쑤다. 천안의 독립기념관 광장에는 ‘겨레상징탑’이라는 돌덩이와 추상적인 벽화는 있어도, 정작 마땅히 있어야 할 3.1독립선언서는 보이지 않는다. 많은 예산을 드려 조성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어록비는 뒷마당에 ‘은폐되어’ 있어 후손이 아닌 일반 관람객들은 그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오늘날 3.1혁명은 사실상 잊혀진 채 겨우 일회성 삼일절 행사에나 남아있을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전국 여기저기에 보이는 ‘3.1운동’ 기념공원이나 조형물들은 3.1혁명의 정신이나 역사를 제대로 기리고 현창하기보다 적당히 그런 모양이나 내기 위해 ‘억지로’ 혹은 임시방편으로 건립된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경우는 망치 들고 외치거나 낡은 옷차림의 군상들을 세워놓아 얼핏 보면 3.1혁명이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로 오해하게 한다.

3.1혁명과 관련된 이상과 같이 분산된 인식 및 방관자적인 관행과 행사들은 결과적으로 3.1혁명의 진면목을 계속 은폐하고 우리의 근현대사가 다만 ‘혼란스럽고 불행한’ 역사일 뿐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적대적인 진영정치를 조장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1948년 제1공화국 정부수립 이래 역대 정부들이 3.1혁명을 기념해 오고는 있지만, 그 성격과 위상에 대한 진솔한 공감과 성숙한 합의는 여전히 부재하거나 불충(不充)한 상태로 남아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어정쩡한 상태가 3.1혁명을 정점으로 하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소수의 “말류(末流, periphery)”에 불과했던 부일(附日)동화주의 세력과 극단적 계급투쟁론자들이 우리의 근현대사를 드러내놓고 분절화(分節化)하고 왜곡하여 그것을 다만 ‘슬프고 분열적인’ 역사로 전락시키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3.1혁명의 정치적 성격과 그 전후사가 분명하게 정리되지 못한 채 계속 방치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비단 정치사회적 엘리트 사이의 정파적 논쟁을 야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는 각급 학교의 역사시간이나 평소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대화가 보다 진지하게 지속되고, 공감 속에 매듭지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또 3.1혁명을 포함한 독립운동 관련 기념조형물들을 현장 답사할 때도 핵심을 생략하고 간단한 사실들만 피상적으로 언급하고 적당히 지나치게 한다. 그 결과, 역사적 줏대가 분명하고 나라에 쓸모 있는 시민양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제반 교육활동을 형식적인 겉치레에 그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3.1혁명의 실상에 대한인식을 새롭게 하고 기존의 ‘3.1절’을 “3.1독립선언절”로 개칭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3.1혁명에 대한 새로운 연구 및 역사적 위상 확립을 위한 다차원적인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삼일독립선언절 명칭변경 서명운동에 동참하고자 하는 단체나 개인은 한국시민리더십학습원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이석현 사무국장 010-6620-2061)

정윤재 삼일독립선언절 명침변경 추진위원회 공동대표(한국시민리더십학습원 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한국지역사회교육재단 이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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