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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단순한 만세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향한 ‘시민들의 위대한 선언’이었습니다.”
최근 3.1절의 명칭을 ‘3.1독립선언절’로 바꾸자는 추진위원회가 발족됐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3.1절’ 또는 ‘3.1운동’이라는 이름 대신, 왜 굳이 ‘독립선언절’로 바꿔 불러야 할까요?
이승렬 전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의 발제문, <‘점진개혁’의 한국 근현대사> 속 역사적 사실들을 들여다보면 그 타당성과 흥미로운 배경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1919년 3월 1일을 일제의 탄압에 맞서 거리로 뛰쳐나온 ‘저항 운동’의 날로만 기억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이면을 살펴보면, 이 날은 단순히 일제를 몰아내자는 시위를 넘어 ‘낡은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민주 시민의 시대를 열겠다’는 거대한 선언이었습니다.
왜 ‘3.1 운동’이 아니라 ‘3.1 독립선언’이어야 할까?
▲옛 지배층은 숨고, 새로운 ‘시민’이 역사의 무대에 오르다
3.1 독립선언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조선을 지배했던 옛 최고위 양반층(경화사족)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식민 체제에 순응하거나 뒤로 물러나 있던 빈자리를 채운 건 기독교, 천도교 등의 종교인들과 도시에 모여 실력을 키우던 진취적인 청년 엘리트들이었습니다. 비로소 왕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백성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민(Citizen)’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신분과 계급을 허문 ‘평등한 거버넌스’의 탄생
이 새로운 시대의 리더들은 과거의 양반들처럼 수직적이고 권위적이지 않았습니다. 종교와 이념이 달라도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며 대등하게 손을 잡았습니다. 누군가 지시하고 복종하는 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네트워크를 통해 수백만 명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시민적 거버넌스’를 훌륭하게 만들어냈습니다.
▲단순한 반일(反日)을 넘어 ‘세계 평화’를 선언하다
이들의 목표는 단순히 일본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독립의 궁극적인 목표를 ‘자유, 평등, 평화, 그리고 인류의 공존공영’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두었습니다. 낡은 유교적 질서를 완벽히 뛰어넘어 근대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이 원대한 선언이 있었기에, 불과 한 달 뒤인 4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피어난 ‘진보적 자유주의’
깨어난 시민들의 주도적인 등장은 당시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무척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은 기존 사무라이 계급과 결탁한 재벌이 지배하며 시민의 자유가 억압되었고, 중국의 상인들은 군벌과 신사 계층에 종속되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식민지의 아픔 속에서도 자유롭고 진취적인 시민 계급이 탄생하며, 훗날 대한민국에 의회 민주주의를 꽃피울 든든한 씨앗을 심었습니다.
다시 부르는 이름, 3.1독립선언절
이제 3.1절을 ‘운동’이라는 방어적이고 물리적인 틀에만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날은 낡은 신분제를 타파한 깨어난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탄생을 전 세계에 당당히 선언한 날입니다. 이름이 바뀔 때,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부심도, 미래를 향한 시민들의 연대 의식도 한 차원 더 높아질 것입니다.
아래는 위 글에 대한 글을 발췌하여 첨부합니다.
3.1운동과 시민적 거버넌스
이승렬 전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기독교와 진취적 지주가 3.1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개항기 이래 사회변동의 결과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진행되었던 구체제의 붕괴 과정에서 사회 주도 세력의 교체되었다. 양반 사대부 중심의 사회 질서가 붕괴되었고, 여러 방면에서 새로운 엘리트층이 부상했다. 철도와 도로가 깔리고 상업과 해외 무역도 늘어났다. 지역의 역할도 달라졌다. 그에 따라 도시의 역할은 더 커졌다. 새로운 엘리트들 중에는 도시를 사회 활동의 거점으로 삼는 자가 늘어났다. 그들은 농촌에 안주하는 지주가 아니라 도시의 ‘시민’으로 거듭났다. 조선왕조사회에서 고위 양반사대부가 아니었던 ‘33인’과 ‘17인’은 바로 그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들이었다. 3.1운동은 도시를 거점으로 하여 서북 지방과 경기·충청 지방을 시작으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고,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3인’은 대부분 한국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시위의 주요 동기라고 밝혔다. <천도교>계 15인 중에는 구체제인 조선왕조에 대한 저항인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많았다. 외래 종교인 <개신교>계 16인이 3·1운동에 참여하는 경위는 천도교와 달랐다. 개신교와 조선왕조는 비교적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약 3년 동안에 한국의 민족주의가 폭발했는데, 그 과정에 기여한 기독교 인사들의 역할은 컸다. 고종은 ‘을사보호조약’에 항의하기 위한 헤이그밀사사건 때문에 강제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구체제 인사들 중 소수는 저항과 참회의 의미를 담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국적으로 의병 투쟁이 일어났다. 이승훈은 개신교를 통해 국가와 민족을 새롭게 인식했다. 국가적 위기는 그가 교육운동가로 거듭나는 계기였고, 기독교는 그에게 새로운 퍼스펙티브를 제공했다. 그는 민족의 실력 양성을 위한 <오산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상인으로서 축적한 자산을 기꺼이 지출하며 헌신했다. 평안북도와 기독교계에서 지도자로 부상한 이승훈은 평안북도 인사들이 많이 관련되었던 ‘105인사건’에서 고초를 겪었고, 3.1운동에서는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유교적 세계의 ‘참봉 승일’에서 ‘기독교 민족주의자 이승훈’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종교계 인사들만 도시를 거점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던 것은 아니었다.
2.8독립선언을 준비하는 동경유학생들의 움직임을 인지한 현상윤·송진우·최린·최남선 4인은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동을 이끌었다. 두 세력은 상대방의 의견과 문화를 존중했고, 서로의 관계는 평등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민적 거버넌스’가 형성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운동 조직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한국인들과 소통했다. 그것은 후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주요 배경이 되었다. ‘33인’을 중심으로 하는 ‘거버넌스’에는 정부라는 요소 즉 행정 체계는 없었지만, 그들의 결정과 행동은 시위에 참여했던 수백만 명은 물론이고 다른 한국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식민 권력에 대항했다는 측면에서 ‘저항적 시민사회’의 중심에 있었다.
이에 비해 구체제의 인사들은(박영효, 윤치호 등) 민족운동의 앞에 나서기를 거부했고, 민간 영역의 종교인들과 진취적 지주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 세력이 한국의 근대를 여는 종을 울렸다(‘33인’이 3월 1일을 거사일로 삼은 것은 고종에 대한 국민의 정서와 의식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황현 같은 비판적 유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국민에게는 국가의 상징이었다).
‘33인’ 중에는 구체제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경화사족’ 출신이 없었다. 천도교와 불교는 조선왕조에서 배척된 종교들이었고, 기독교는 외래종교였다. 구체제를 주도했던 경화사족의 일부는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해외로 망명했지만, 대부분의 경화사족은 식민지 지배체제에 순응했다. ‘33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구속된 ‘17인’ 중에는 도시를 거점으로 산업화 세력으로 성장할 진취적 지주층을 대변하는 송진우·현상윤 같은 청년 엘리트들과 천도교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식민지 권력을 부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이념에 의한 한국인들을 위한 국가 수립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새로운 정치적 인간들이 한국 시민계급의 초석을 놓았다. 그들은 아직 소수였지만, 민족운동을 이끄는 지도부를 형성했다. 그들은 위계적이지 않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또 독립을 주장했으나 일본을 배격하지 않았고, 또 독립의 목표를 공존공영과 평화라는 보편 이성의 실현으로 잡았다. 3.1운동은 구체제에 대한 일국적 의미의 반체제 그리고 반제국주의 운동이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은 양국 사이의 과제가 아니라 자유·평등·평화·공영의 실현이라는 보편적 의제가 되었다. 이렇게 유교를 넘어선 근대적 이념을 정립한 한국인들은 1919년 4월에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대한민국 수립과정에 참여했다.
이러한 도시 세력의 형성은 민족주의의 방향에—독재 혹은 전체주의 대 의회민주주의—큰 영향을 주는 변수였다.
우리는 활동적이고 독립적인 시민들의 존재가 의회 민주주의의 성장에 필요불가결한 요소였다고 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주장에 즉시 확실한 동의를 표할 수 있다.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농업사회에만 국한시킨다면 영웅은 무대 위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전체주의적 악당(the totalitarian villain)은 때때로 농촌 지역에 살았고, 도시들의 민주주의 영웅(the democratic hero of towns)은 중요한 동지들을 도시에서 갖고 있었다.
우리가 17·18세기 영국과 19·20세기 한국을 비교할 지점을 찾기는 어렵다. 영국과 달리 조선왕조에서 수출무역을 위한 도시의 발달은 없었고, 해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겠다는 욕망을 지닌 양반 지주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도시는 내륙에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조건은 다르지만, 영국의 케이스는 개항 이후 식민지기에 걸쳐 진행된 사회변동의 한 줄기를 이해하는 데 단서를 준다. ‘민주주의적 주인공들’은 그의 ‘중요한 동지들’을 도시에서 만났고, 그들은 국왕의 관료체제에 저항했었다.
조선(한국)은 식민지를 경유하면서 전통과 단절되었다. 예를 들어, 한성은행(신한은행 전신)과 대한천일은행(우리 은행 전신)을 조선왕실과 함께 만들었던 기호지역의 시전·경강·개성 상인들의 명맥은 일제시기까지 이어졌지만, 일본 경제계 내에서 점차 소멸되었고 해방 이후에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비해 제국주의 일본은 전통 위에서 근대를 건설했다. 에도(江戶)막부 시대부터 대상인이었던 정상(政商) 미츠이(三井)는 은행을 위시하여 다양한 방면에 진출하여 대재벌로 성장했고, 그들은 근대 일본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일본의 도시들은 서구의 충격을 흡수하면서 메이지유신을 추진할 수 있었던 여력이 있었지만, 유럽과 달리 지속적인 자치권을 획득하지 못하였다. 미츠이의 장기 지속은, 즉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사무라이와 상인의 ‘공생적 적대관계’(symbiotic antagonism)가 메이지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미츠이 재벌의 총수였던 단 타쿠마(團琢磨, 1858~1932)는 1932년 3월 5일, 일본 도쿄에서 우익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된 것은 ‘전통의 연속’을 상징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속성’은 일본의 도시에서 ‘민주주의적 주인공’이 탄생하기 어려우며 또 ‘자유가 약한 자유주의’가 강력하게 존재하는 일본 근대의 내면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의 주인공들’은 군벌에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또 다른 ‘도시의 주인공들’인 상인 출신의 부르주아지들은 여전히 군벌에 강력하게 맞서지 못했다. 1912년 2월에 마지막 청 황제가 퇴위하였고, 3월에는 쑨원(孫文)이 중국으로 돌아와 임시 헌법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신생 공화제 정부는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이스트만(Lloyd E. Eastman)의 지적처럼, 상인들은 청조의 독재정치에 반대하고 입헌운동에 참가했지만—그래서 1911년 신해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라고 평가되기도 하지만—이 시기 상인은 정치적 심리적으로 신사(紳士) 계급에게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식민지로 전락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이 거듭 좌절되었지만 두 개의 진보적 자유주의 흐름이 등장했다. 하나는 개항 이후 구체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진취적 지주들이 상업적 농업을 기반으로 하여 부르주아지(2세대)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운동과 연결된 기독교였다. 한국과 미국은 외교적 군사적 관계에서는 소원했지만 개신교를 매개로 하여 연결되었다. 1882~1885년 사이에 미국을 경유한 서구 문명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길이 열렸다(그때 고종의 역할도 주목을 받아야 한다).
한국은 영국 주도의 국제질서(비인체제) 동아시아까지 확장되면서(영일동맹)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었지만, 중국이나 일본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진보적 자유주의 흐름을 갖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