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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민족성과 미래적 가치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미래 속에서 재해석되는 정체성의 문제

▲서언: 정체성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정체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인간과 집단의 존재방식을 생각하면 자명하다. 모든 존재물은 저마다의 정체성을 지니며, 인간 또한 단순히 주어진 존재를 반복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세계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새롭게 창조해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본성과 변성, 곧 정체성을 아는 일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생활의 전제이며, 나아가 가치관·세계관·역사 운영관을 세우는 근본 원리가 된다. 특히 집단의 경우 정체성은 그 집단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지향하며, 어떤 방식으로 역사적 위기를 돌파할 것인가를 규정하는 심층 구조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정체성, 곧 한민족의 민족성은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의 눈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 중국의 중화주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사관, 서구 근대의 문명론과 발전 단계론은 한민족을 외부의 거울 속에 비친 모습으로 평가하고 재단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타자의 저울과 판단의 틀 속에서 이해해 왔고, 때로는 자기 존재의 권리와 가치를 외부에 위탁해버리기까지 했다. 이것은 단지 잘못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역사를 자율적으로 운영할 능력을 약화시키는 문제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존재 이유와 가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상을 단순히 나열하는 일이 아니라 구조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가지를 세는 작업이 아니라 줄기를 붙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한민족이라고 유형화된 우리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유목과 해양, 농경이 함께 빚어낸 탐험정신의 민족성으로 이해한다. 물론 어떤 집단의 품성을 한마디로 단정하는 일은 위험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조건인 생태환경과 역사적 경험을 기준으로 보면, 한민족은 단일한 생태와 단일한 문화 속에서 형성된 집단이 아니라 서로 다른 환경이 교차하고 충돌하며 융합되는 복합 공간 속에서 생성된 집단이었다. 이 복합성 속에서 역동성과 목적지향성, 자유의지와 조화의식이라는 구조적 특징들이 장기지속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민족성의 개념: 본성과 변성의 변증법

민족성이란 눈에 보이는 습속이나 풍속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시대와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면서 집단의 다른 부분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성향이다. 따라서 민족성은 고정불변의 본질이 아니라, 본성과 변성이 긴장과 상호작용을 거듭하면서 형성된 역사적 현상이다.

여기서 ‘본성’이란 일종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특성과 생태환경에 대한 장기간의 적응 결과가 축적되면서 나타나는 기본적 경향성이다. 물론 본성 또한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기후와 환경에 따라 신체적 특성이 달라지듯이 인간 집단의 경향성도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장기간 축적된 방향성과 반복되는 성향은 일정한 원형을 이룬다. 반면 변성은 전쟁, 이주, 질병, 기술 혁신, 제도 변화, 무역과 교류, 외압과 정복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집단에 가한 충격과 그에 대한 선택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민족성은 선천적 본질이나 후천적 산물 가운데 하나로 환원될 수 없으며, 본성과 변성이 맞물려 만들어내는 역사적 구조로 이해되어야 한다.

민족성의 생성 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생태환경이다. 기후, 지형, 숲과 초원, 강과 바다, 동식물과 토지는 무엇을 먹고 어떻게 생산하며 어떻게 이동하고 정착할 것인가를 규정한다. 생존 방식은 의식주를 결정할 뿐 아니라 삶과 죽음의 인식, 역사관, 가치관까지 형성한다. 둘째는 인문환경이다. 인구의 증감, 국가 제도의 변화, 전쟁과 무역, 질병과 신기술의 확산은 집단적 기억을 축적시키고 그 기억은 문화로 굳어져 민족성의 일부가 된다. 셋째는 집단의 선택이다. 인간은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엇을 가치로 삼고 어떤 질서를 옳다고 볼 것인가를 선택하는 존재이다. 교육, 풍습, 제례, 상식, 제도는 모두 그 선택의 결과이며, 따라서 민족성은 언제나 시대성을 전제로 한다. 같은 집단이라도 시대정신과 기술, 문화의 변화에 따라 정체성의 표현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개념 규정에 따르면 한민족의 민족성을 논하는 일은 단순히 현재의 습속이나 감정 구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지속의 생태환경과 역사 경험, 그리고 반복된 집단적 선택이 만들어낸 구조적 특성을 밝히는 작업이 된다.

▲한민족의 민족성: 생태와 역사, 선택이 빚어낸 구조

△복합 생태권과 형성의 조건

한민족의 민족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형성의 터를 보아야 한다.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그 주변은 산과 강, 바다와 평야가 교차하는 복합 생태권이었다. 북방의 유목적 역동성, 동해와 서해를 통한 해양활동, 남부의 농경문화가 동시에 작동하였다. 다시 말해 이 공간은 정주와 이동, 개척과 방어, 교류와 충돌을 한꺼번에 요구하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복합 환경 속에서 살아온 집단은 단일한 생활양식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역동성과 적응력, 외부를 향한 개방성과 새로운 조건을 향한 도전성이 자연스럽게 길러졌다.

이 복합 생태권은 단순한 지리적 배경이 아니라 민족성의 구조를 빚어낸 근본 조건이었다. 북방 초원의 기마적 역동성, 강과 바다가 제공한 이동성과 교류성, 농경이 요구한 정주성과 조직성은 한민족 내부에서 대립하기보다 서로를 견제하고 보완하며 독특한 복합성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한민족은 어느 하나의 생태적 원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집단이며, 바로 이 복합성이 민족성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역사 경험과 다핵적 재구성

이 생태적 조건 위에 누적된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끊임없는 이동과 교류, 외침과 교섭, 국가의 흥망 속에서 한민족은 단일한 중심을 고집한 집단이 아니었다. 고조선에서 고구려·백제·신라, 발해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는 늘 다핵적이고 복합적인 구조 속에서 전개되었다. 중심이 이동하고, 여러 중핵이 병존하며, 주변이 때로 중심이 되는 구조 속에서 집단은 스스로를 반복적으로 재구성해왔다. 이러한 역사 경험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경직된 본질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 속에서 응집하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재편되며, 외래 요소를 흡수하되 자기화하는 유연성을 길러냈다. 따라서 한민족의 민족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장기적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어 온 구조적 능력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집단의 선택과 가치의 방향

그러나 환경과 경험만으로 민족성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것은 집단의 선택이다. 같은 조건 속에서도 무엇을 더 높은 가치로 둘 것인가는 집단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한민족은 힘의 절대화나 일방적 정복보다는 빛과 밝음, 조화와 어울림, 공동체적 질서를 상대적으로 더 높은 가치로 선택해왔다. 이 선택은 우연한 취향이 아니라, 복합 생태권 속에서 살아남고 지속되기 위한 문명적 응답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한민족의 정체성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환경은 조건일 뿐이고, 역사적 경험은 재료일 뿐이며, 그것들을 엮어 일정한 문명적 방향으로 만든 것은 집단의 선택이었다.

▲한민족의 민족성: 네 가지 구조적 특징

△탐험정신: 정주가 아니라 동중정의 문화

한민족의 첫 번째 구조적 특징은 탐험정신이다. 한민족은 단순한 정주 집단이 아니었다. 유라시아의 여러 길을 통과하고, 북방 초원과 내륙의 사막과 산지, 큰 강과 대양을 넘나들며 이동하고 정착하였다. 고구려의 북방 진출, 고대 국가들의 해양활동, 외침 속에서도 문화를 보존하고 재구성한 사례들은 단순한 생존의 흔적이 아니라 탐험의지와 개척성의 표현이다.

이 때문에 나는 우리 문화를 정태적이거나 정중동의 문화가 아니라 ‘동중정’, 곧 움직임 속에서 안정을 찾는 문화, 다시 말해 ‘mo-stability’의 문화라고 본다. 그동안 한민족을 한과 슬픔, 체념과 수동성으로 묘사한 통설은 이 점에서 사실을 크게 왜곡해왔다. 물론 고난의 시대에는 그 탐험정신이 ‘은근과 끈기’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 성향이 정적이어서가 아니라, 이동과 개척의 오랜 경험 속에서 형성된 장기적 인내의 방식이다.

△가치 지향성: 생존을 넘어 의미를 추구한 집단

두 번째 특징은 가치 지향성이다. 한민족은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명분과 의미를 중시해왔다. 감성적이면서도 동시에 원리와 원칙을 강조하는 이중 구조가 여기에 놓여 있다. 국가 명칭과 왕의 칭호, 인명의 어휘 속에 반복되는 ‘해’, ‘밝음’, ‘광명’의 상징은 존재의 가치를 하늘과 빛의 이미지 속에 투영한 결과이다. 단군신화의 홍익인간도 단지 정치 이념이 아니라 세상을 밝히고 널리 이롭게 하려는 가치지향의 선언이다. 이는 한민족이 단지 살아남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의미 있는 삶과 질서를 추구한 집단이었음을 보여준다.

△자유의지의 실천: 저항과 자발성의 역사

세 번째 특징은 자유의지의 실천이다. 한민족은 강한 자의식과 저항성을 지닌 집단이었다. 중앙집권적 권력은 반복해서 도전받았고, 의병과 민란, 자발적 산업화와 민주화 운동 같은 집단적 자발성이 역사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절대적 영웅의 통치보다는 공동체적 참여와 저항이 더 자주 역사 전면에 등장하였다. 단일한 종교체계 대신 다양한 신앙이 공존한 사실 또한 자유의지의 반영이다. 물론 이 성향은 때로 오기와 분열, 조직문화의 미발달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외부 압력이 강해질 때 그 성향은 오히려 강력한 응집력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분열은 본성이 아니라 자유의지가 왜곡된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

△어울림 사상: 관계적 사고와 조화의 원리

네 번째 특징은 어울림 사상이다. 유목, 해양, 농경이 교차하는 복합 생태환경 속에서 형성된 한민족은 단선적 사고보다 관계적 사고를 발달시켰다. 조화와 포용, 유연성은 문화 전반에 스며 있다. 단군신화의 ‘3의 논리’와 ‘홍익인간’은 지배의 이념이라기보다 공동체적 조화의 원리이며, 풍류 또한 경직된 교리가 아니라 어울림과 화합을 중시하는 문화적 태도였다. 이 어울림은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갈등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개방과 재구성의 힘으로 작동해왔다는 사실이다. 한민족의 깊은 층위에는 언제나 대립을 넘어 관계를 새롭게 짜는 성향이 살아 있었다.

▲분열은 본성인가: 갈등의 역사와 본래의 구조

오늘날 지역 갈등과 당파성이 과연 한민족의 본성인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신중해야 한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경쟁, 조선시대의 붕당 갈등은 분명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민족성의 본질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외부의 충격이 약할 때 내부 갈등이 확대되는 경향이 있었고, 현재의 갈등 또한 조선적 질서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역사적 잔영의 성격을 지닌다.

본래의 민족성은 분열보다는 조화와 통일에 가깝다. 단군신화의 홍익인간은 분열을 전제로 한 지배 논리가 아니라 널리 이롭게 하는 공동체적 이상이었고, ‘3의 논리’ 또한 둘 중 하나를 배제하는 이분법이 아니라 서로 다른 요소를 균형 속에서 묶는 삼원적 구조였다. 결국 갈등은 환경과 역사적 조건이 만들어낸 표면적 현상이지, 근원적 본성 그 자체는 아니다.

▲미래적 가치: 21세기 문명 전환과 한민족성의 재해석

21세기 인류 문명은 질적 전환의 국면에 들어섰다. 인터넷의 확산과 인공지능의 등장은 새로운 인간형, 곧 디지털 인간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중앙집권적 구조는 해체되고, 네트워크형 사회가 확산되며, 집단적 노동보다 창의적 일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개인의 자유는 확대되지만 그만큼 책임도 커진다. 이 시대는 분산과 연결의 시대이며, 개인의 독립성만큼이나 새로운 공동체성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민족의 민족성은 미래적 가치를 갖는다. 탐험정신은 미지의 기술과 새로운 공간을 개척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가치 지향성은 기술 중심 사회에서 인간 중심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자유의지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자율적 책임 주체를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어울림 사상은 분산된 개인들을 새로운 공동체로 연결하는 철학적 토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족성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재해석될 때 미래의 자산이 된다. 본성과 변성의 구조를 인식하고, 시대성 속에서 다시 구성할 때 한민족의 정체성은 21세기 인류 문명이 요구하는 하나의 모델로 작동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묻는 일은 결국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일과 같다. 정체성은 단지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이다. 역사 속에서 형성된 품성이 미래를 설계하는 자원이 될 때, 민족성은 더 이상 과거의 짐이 아니라 미래의 힘이 된다.

▲맺음말: 역사 속의 정체성, 미래 속의 선택

결국 한민족의 민족성은 유목과 해양, 농경이 만나는 자리에서 형성된 복합적 산물이며, 탐험정신과 가치지향성, 자유의지와 어울림 사상을 구조적 특징으로 지닌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한과 체념, 수동성과 정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역동적 정체성이다. 외부 압력이 강할 때 우리는 놀라운 응집력을 보여주었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마다 스스로를 재구성해왔다. 그러므로 현재의 분열과 혼란 또한 극복 불가능한 운명이 아니라, 다시 선택하고 다시 조직할 수 있는 역사적 과제이다.

정체성은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미래 속에서 재해석되는 선택의 구조이다. 한민족의 민족성을 다시 묻는 일은 과거를 기념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문명사적 작업이다. 유목과 해양, 농경이 만난 자리에서 태어나 탐험정신과 빛의 가치, 조화와 자유의지를 선택해온 집단, 그것이 한민족이 지닌 한 핵심적 모습이며, 또한 앞으로도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미래적 자산이다.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 국립사마르칸드 대학교 교수

윤명철 교수의 주요 연구분야는 고구려사와 동아시아 해양사이며, 광개토태왕을 통해 21세기의 ‘고구리즘(gogurism)’의 실현을, 장보고를 통해서는 ‘동아지중해 물류장 역할론’을 꿈꾸고 있다. 고구려연구회 부회장, 한민족학회회장, 고조선 단군학회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3년 대한해협 뗏목 학술탐사를 시작으로, 2회에 걸쳐 중국 절강성에서 한국까지 황해문화 뗏목 탐사를 실시했고, 2003년에는 중국 절강성에서 인천을 경유, 제주도와 일본까지 뗏목 장보고호를 타고 43일간 학술탐사를 한 바 있다. 해양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근정포장을 수훈했으며, 1회 김찬삼여행상을 수상했다. 또한 동아일보 창간 90주년 행사로서 추진된 ‘2020년 한국을 빛낼 100인’에 선정됐다. 60여 권의 저서와 다수의 공저 및 160여 편의 논문, 18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고구려 및 해양과 관련된 TV방송강의, 출연, 연재 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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