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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EF타임즈 인터뷰] 지역사회교육운동, 사람으로 이어지다…두번째 만난 사람: 한상완 제4대 이사장

도서관의 문을 열고 지역사회의 마음을 잇다: 한상완이 걸어온 길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남지만, 이야기는 결국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 본다.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지나 성장과 변화를 함께 겪어온 그는,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 교수로서 대학 행정을 이끌며 부총장을 지냈고, 대통령 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아 국가 도서관 정책을 이끌어온 한상완 교수이다.

또한 지역사회교육운동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왔으며, 교육재단의 4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정년퇴임 이후에는 시를 쓰기 시작하며 삶의 결을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다.

서로 다른 자리처럼 보이지만, 그의 걸음은 하나의 맥으로 이어져 있다.

 

 

 

 

국회 51번, 도서관의 문을 열다.

한상완의 생애에서 도서관은 공간을 넘어 국가의 미래였다.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았을 때, 그는 점잖은 학자의 틀을 깨고 정책 결정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도서관을 지어야 된다. 도서관이 없으면 아이들이 갈 곳이 없다.’ 그 생각을 붙들고 국회와 기획예산처를 오가며 예산 확보를 위해 끝까지 매달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주저 없이 말을 꺼냈다.

“1조만 주십시오. 다들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서 다시 말했지. 그럼 9,800억만 주십시오.”

당시 한 국회의원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교수의 억지라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횟수를 적어가며 국회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세어보니 51번을 갔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예산결산위원회에 모교 출신 국회의원이 있었다.

“요즘 컴퓨터가 다 있는데 도서관이 왜 필요합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하고는 더 이상 이야기 안 하겠네.”

그는 그 말을 듣자 곧바로 받아쳤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 이후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예산 확보를 위해 움직였고, 끝내 5,800억 원의 예산을 이끌어냈다. 이 돈은 전국에 공공도서관을 세우는데 쓰였고, 사람들이 모여 배우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자리 잡아갔다.

9년의 도전, 세계를 한국으로

그의 시선은 국내를 넘어 세계로 향해 있었다. 세계 도서관 인들의 최대 축제인 ‘세계도서관정보대회(WLIC)’를 한국에 가져오기 위해 그는 무려 9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 남들은 한두 번 거절당하면 포기할 일이었지만 그는 달랐다.

“9년을 했어요. 그거 유치하려고 세계를 계속 다녔지. 안 된다는 소리 들을 때마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유치에 성공했어요. 전 세계에서 3,200명이 한국으로 몰려왔지. 우리나라 도서관 역사상 그렇게 큰 국제 규모 행사는 처음이었을 거예요.”

행사를 마친 뒤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정리했다. 행사 운영을 통해 남은 금액은 다시 현장과 조직을 위해 나누었고, 일부는 국제 본부에도 보냈다. 그 일은 함께한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한국 도서관과 문헌정보학이 세계와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전환점이 되었다.

 

 

 

 

사람으로 이어진 인연

세계도서관정보대회를 우리나라에 유치하기 이전, 그의 걸음을 이끈 인연이 있었다. 시작은 도서관이었다. 전국 학교도서관 살리기 국민연대를 결성하며 여러 단체와 함께했고, 그 자리에서 지역사회교육운동을 이끌던 주성민 이사장을 만나게 된다. 당시 학교 도서관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정책과 예산이 필요했다. 주성민 이사장과 함께 교육부 장관을 찾아갔다. 그 만남은 주성민 이사장이 자리를 마련했고, 한 교수는 그 자리에서 직접 이야기를 꺼내며 설득을 이어갔다.

“학교 도서관을 살리는 일은 이 나라 교육을 제대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는 학교 도서관의 필요성을 거듭 설득했다. 전국 학교에 필요한 사서 교사 규모와 예산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단계적 확대 방안을 요구했다. 장관은 일부를 수용해 일정 규모의 정원을 배정했지만, 실제 배치는 시·도 교육감의 권한에 맡겨지면서 현장에서는 다른 교과 교사로 전용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다시 장관을 찾아가고, 또 설득을 이어갔다. 그렇게 반복된 설득 속에서 학교 도서관과 사서 교사 제도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현장의 이야기는 결국 정책의 자리로 이어졌다.

함께했던 인연은 시간이 흐른 뒤 다른 방식으로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한 총장님, 이제 품앗이 합시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때 한 총장님이 학교 도서관 살리기 할 때 저도 도왔으니, 이제는 지역사회교육운동을 하는 데 오셔서 저를 좀 도와주셔야지요. 이사로 오시는 걸로 알고 전화 끊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이 통화에는 웃음기가 돌지만, 그 안에는 가볍지 않은 뜻이 담겨 있다. 그는 주성민 이사장의 그 말을 받아들였다.

“같이 일할 만하니까 온 거지요.”

그렇게 이어진 선택에는 이유가 있다. 좋은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그 인연은 다시 다음 길로 이어진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힘

지역사회교육운동에 참여하면서 한상완 교수가 더 깊이 감동한 이들은 지역의 위원들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뜻과 헌신이 건물을 세웠다면, 이분들의 헌신은 그 안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전국 32개 지역에 우리 위원들이 있어요. 이 분들은 정말 선해요. 자기 시간 들이고, 돈 들이고, 그렇게 모여서 회의하고 활동을 이어가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른 시민단체보다 훨씬 응집력이 있고, 정말 열심히 하는 분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지역사회교육운동을 지탱하는 사람들이죠. 이런 모임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행복을 미리 배우는 교육

한상완 교수는 지역사회교육을 거창한 구호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행복의 예습’이라 말한다.

“지역사회교육이란 미래의 행복을 미리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와서 배우는 게 즐겁고, 옆 사람과 마음이 열리고, 그렇게 행복을 연습해야 나중에 진짜 행복해지는 거거든요.”

그의 말은 따뜻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사회의 성장을 인정하면서도 풍요 뒤의 그늘을 직시한다. 이제는 양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왜 함께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질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강국이고 대학 진학률도 세계 1위예요. 근데 왜 사람들은 더 불행하다고 생각할까요? 그건 철학이 없어서 그래요. 이제는 수준에 맞는 교육이 필요해요. 왜 모여야 하는지, 왜 함께 살아야 하는지, 그 철학을 함께 배우고 나누는 것이 지역사회교육운동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내’에서 ‘우리’로

지역사회교육운동 40주년을 맞아, 시인인 한상완 교수는 축시를 썼다. 축시에는 그의 인생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내 것’의 울타리를 허무는 작업이었다.

…… 내 동네 우리 동네/ 내 아이 우리 아이/ 정성과 섬김으로/ 잘 기르고 잘 가르쳐/ 지역사회 일꾼으로/ 나라의 동량으로/ 행복누리는 민주시민으로/ 세계를 보듬는 세계인으로/ 키워내고 우뚝 세워 …… 온 날에 퍼져있는/ 지역의 닫힌 학교에/ 열린 학교 만들어/ 배우는 학생과 지역의 주민이/ 함께 주인되어/ 평생교육의 즐겁고 보람찬/ 아름다운 공간 만들기에/ 몸 던졌던 긴긴 세월/ 불혹의 나이/ 땀흘려 가꾸고/ 정성 쏟아 열매 맺었으니/ 오늘은 기쁨과 보람 영글어/ 함께 얼싸안고 춤추는/ 축제의 날 ……

이 축시는 그가 평생 강조해 온 교육관을 압축한 표현이다. 개인 중심의 교육을 넘어 공동체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내’에서 ‘우리’로 이어지는 반복 구조 안에 담겨 있다.

삶을 넓히고 깊게 하는 지역사회교육

“지역사회교육은 시야를 넓혀주고, 또 깊게 해주는 거예요. 그렇게 삶을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데 의미가 있는 거죠. 어떤 면에서는 교육이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예술 같은 거예요. 결국은 사람을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는 지역사회교육이 지향하는 방향이 담겨 있다. 삶을 넓히고, 더 깊게 바라보게 하는 일. 그는 그것을 교육이면서 동시에 삶의 한 방식으로 보고 있었다.

학자에서 시인으로

한상완 교수는 학문의 길을 걸어온 뒤, 마음속에 간직해온 문학으로 돌아왔다. 마음 한켠에 늘 머물러 있던 문학청년의 시간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퇴임하고 나니 이제 한번 써볼까 싶더라고요. 그동안 끄적여 둔 글이 한 사십 편쯤 있었는데, 지인의 소개로 박목월 선생님이 만든 「심상」에 보내게 됐지요. 그랬더니 바로 등단을 시켜주더라고요. 하, 그때부터 시를 쓰고 시집도 내고 하다 보니 다섯 번째 시집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는 음악으로도 이어졌다.

“어느 여름 보름밤이었어요. 보름달이 떴는데, 하늘에 달이 하나가 있고 호수에도 하나 있고, 내 눈에도 하나가 있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시를 썼어요. 그 시가 「여름 보름밤의 서신」이예요. 그걸 보고 이안삼 작곡가가 곡을 붙였어요. 무대에서 성악가가 그 시를 노래하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참느라 혼났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곡이 예순 곡쯤 되더라고요.”

“음악은 음으로 그린 시고, 시는 글로 쓴 시고, 그림은 눈으로 그린 시예요. 셋 다 시지요.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 본질은 다 시라는 거예요.”

그에게 시는 더 이상 글에 머물지 않는다. 음악이 되어 그의 삶 속에서 다시 울리고 있다.

12년, 한 사람과의 시간

한상완 교수의 삶에는 오래 이어온 만남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박경리 작가와의 인연이다.

“처음 만났을 때를 잊지 못해요.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요. 사람을 그냥 꿰뚫어 보더라고요. 근데 그 무서운 눈빛 속에 담긴 통찰이 엄청났지. 2주에 한 번씩 만나 저녁을 먹었어요. 한 번 앉으면 세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학, 역사, 인간… 정말 모르는 게 없더라고요. 가끔 박완서 작가도 함께 하시곤 했어요. 돌아가실 때까지 12년을 그렇게 만났으니 내 인생 최고의 축복이지요.”

그 시간은 지금도 그의 삶에 깊이 스며있다. 그렇게 그는 여러 자리에서 살아왔다. 학자로, 대학의 행정가로, 국가 정책을 맡았던 자리에서, 또 지역사회교육운동의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왔다. 정년퇴임 이후에는 시를 쓰며 또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결국 그의 말은 사람으로 돌아온다. 사람을 만나고, 함께 배우며 살아가는 일. 그는 지금도 그 자리에서 그 일을 이어가고 있다.

인터뷰 및 글: 김일규 / 사진: 이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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