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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원 칼럼] 전문성의 평준화

인공지능이 사회 전반에 빠르게 확산하면서 직업 생태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인공지능은 단순한 자동화 기술을 넘어서, 진단, 판단, 예측, 의사결정 등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까지 핵심 기능들을 일부 대체하거나 보완하고 있다. 과거에는 전문직 라이선스가 성공과 계층이동의 사닥다리였다. 국가는 엄격한 시험제도를 통하여 극소수의 인재에게 독점적 업무 권한인 면허를 부여하여 일반인을 전문인에게 종속시켰지만, 지식의 복사 비용이 0에 수렴하는 인공지능은 전문직의 견고한 아성을 흔들고 있다. 인공지능이 전문직의 지식에 기반한 노동을 일부 대체하면서 시간당 수익모델에 균열이 생기고 전문직 고용시장이 축소되고 있다. 미국 법학 배치협회(NALP)의 조사에 따르면, 2025년 대형 로펌들의 변호사 모집률이 7.5%가 감소하였다.

인공지능을 통한 의료계의 지각변동은 영상의학과, 병리과, 피부과처럼 이미지의 패턴을 분석하는 분야에서 먼저 일어나고 있다. 2019년 의학 학술지 ‘란셋 디지털 헬스’(Lancet Digital Heath)는 딥러닝 알고리즘과 의료 전문가의 영상 데이터 분석 자료를 비교하였는데, 질병을 정확히 진단한 비율이 인공지능은 87%, 전문가는 86.4%로 나타났다. 인간은 수백 장의 영상 자료를 들여다보면서 피로가 쌓이고 집중도가 떨어지지만, 인공지능은 무제한 집중할 수 있다. 인공지능 도입의 선구자인 미국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은 이제 의사의 전문성은 축소되고 인공지능의 진단 결과를 환자에게 설명하고 치료 과정을 조율하는 역할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회계, 세무, 컨설팅 업계에서는 인공지능 에이전트가 투입되어 신규 채용이 감소할 뿐 아니라 전문가의 업무는 인공지능 시스템이 걸러낸 이상 징후를 판단하는 일로 축소되고 있다. 하버드 대학과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연구진이 ‘보스턴 컨설턴트 그룹’의 컨설턴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인공지능을 사용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과제를 12% 더 많이, 25% 더 빨리 끝냈으며, 결과물 평가에서는 40% 이상 높은 점수를 기록하였다. 실험 전 평가에서 하위 50%에 속했던 컨설턴트들의 점수는 43% 올랐고 상위 그룹 50%의 상승폭은 17%에 그쳤다. 수련 과정과 경험을 통하여 도달한 분석력, 기획력이 인공지능을 통해 기본값이 되고 전문성의 평준화가 일어난 것이다. 전문성의 격차가 줄어드는 것은 전문직이 누려왔던 고임금이 근거를 무너뜨린다.

우리나라는 아직 전문직 자격증을 위한 좁은 문에 인재와 자본을 쏟아붓고 있다. 사교육 시장은 ‘초등학생 의대 준비반’이라는 기형적 현상을 만들어냈고, 청년들은 빛나는 젊음의 시기를 신림동 고시촌과 로스쿨 학원가에 묻어둔 채 자격증 시험에 매달리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의 끝에서는 이미 지식의 독점 구조가 해체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암기 위주의 시험을 통과한 인재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마주치게 되는 대상은 밤새워 외웠던 법조문과 의학 지식을 단 1초 만에 무료로 대중에게 쏟아내는 인공지능이다. 한편, 전문직 내부의 양극화도 심각하다. 인공지능을 통해 전문직이 소멸하기보다는 법적인 책임과 최종 승인을 위한 면허 제

도는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내부의 권력과 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한쪽에서는 인공지능이라는 레버리지를 손에 쥐고 시장을 지배하는 소수의 슈퍼 전문직이 등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다수의 평범한 라이선스 보유자들이 존재할 것이다. 라이선스 보유자들은 책임 대행인으로 전락하여 인공지능이 작업한 초안, 진단서, 처방전에 서명하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떠안는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난 세기 동안 받아들여온 지식과 성공의 방정식을 다시 써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지식 자체는 누구나 어디서나 얻을 수 있는 값싼 소비재가 되었으며, 얼마나 지식과 정보를 습득했는가를 측정하는 시험은 더 이상 개인의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전문가의 의미가 재정의되는 시대에, 전문성의 사회적 기반과 역할은 재조정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 기반 업무가 빠르게 기계화되는 반면, 인간의 판단력과 창의성, 정서적 상호작용이 필요한 영역은 그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제 전문가에게 남겨진 자리는 인공지능이 찾지 못하는 새로운 가치를 규정하거나 도덕적 딜레마에서 결단을 내리고, 인간 고유의 영역이다. 기술적 지식이 보편화될수록 역설적으로 협상력, 설득력, 비판적 통찰력은 대체 불가능한 인간의 능력이다.

홍순원 논설위원·(사)한국인문학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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