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같이多가치
공부하는 체대생 동아리, ‘고목회’를 이끌며
학습과 실천의 두 날개를 펼치다.

공원에서 시작된 길
유승희 교수는 학생 시절 지역사회교육운동을 만난 이후 반세기 넘게 그 현장을 지켜온 사람이다. 대학 시절 ‘고목회’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현장을 경험했고, 졸업 후에는 YMCA 전임지도자로 일하며 청소년들과 함께했다. 이후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처장, 교무처장, 기획조정실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고 한국체육학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학생 시절 지역사회교육운동의 현장에 뛰어든 그는 이후 재단 이사와 이사장을 맡으며 줄곧 지역사회교육운동과 함께해 왔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1960년대 대학 시절로 되돌아갔다. 남산 공원에서 아이들과 뛰어놀던 기억이었고, ‘고목회’와 지역사회학교로 이어진 경험이었으며, 한 체육대학생이 지역사회교육운동과 함께 성장해 간 시간들이었다.
고목에서 새잎이 돋듯
1964년, 경희대학교 체육대학에 입학한 유승희가 마주한 대학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당시 체육대학은 선후배 사이의 위계가 매우 강했다. 속된 표현으로, 하루에 한 번 선배들한테 ‘빳다’를 안 맞으면 서운했던 시절이었다. 잘했든 잘못했든 매일같이 맞아야 했다. 공부는 없었다. 질문도 없었다.
“그러니까 한두 달 다녀보니까, 아 이거는 대학생활도 아니고 학교도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눈빛으로 봐서 아유 우리들도 공부 좀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 모인 거예요. 처음에 한 대여섯 명이 하다가, 다들 그래 체육대학생들도 공부를 좀 해야지. 그래서 세미나를 한번 해보자.”
학생들은 토요일 저녁이나 일요일이면 창경원과 남산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돈이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짜장면과 우동으로 끼니를 때우며 토론을 이어갔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짜우회’라는 별명도 붙었다. 모임이 이어지자 교수들을 초청해 이야기를 듣는 자리도 만들었다. 처음에는 경희대학교 교수들이었다. 그러나 점차 타 대학 교수들까지 직접 찾아가 초청하며 배움의 폭을 넓혀 갔다. 당시 웬만한 대학의 체대 교수들도 다 알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상하게 교수님들을 모셔놓고 얘기를 하니까 그 분들도 그렇게 좋아하시는 거예요. 학교에서 뵙던 교수님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전문적인 지식만이 아니라 당신들이 지금까지 걸어오신 인생길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더라구요. 그러면서 나는 내가 니네들 때로 돌아가면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생들이 창경궁을 거닐고 있는데 고목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수백 년은 됐음직한 늙은 나무였다. 거기서 새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야 우리 모임 이름을 하나 만들자. 저렇게 몇 백 년 된 고목에서도 새로운 잎이 나는데, 우리도 운동만 할 게 아니라, 저 고목처럼 오래 되어도 새로운 싹을 움트는 그런 사람이 되어보자. 그래서 이름을 ‘고목’이라고 지었어요.”
‘고목회’라는 이름에는 운동만 하던 체육대학생으로 머물고 싶지 않았던 젊은 학생들의 고민이 담겨 있었다. 공부하고 토론하며 스스로 대학생활을 만들어 가려는 학생들의 모임이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사회교육운동과 만나게 된다.

남산 놀이터
고목회가 만들어진 뒤 학생들은 더 자주 학교 밖으로 나갔다. 토론만으로는 부족했다. 배운 것을 직접 해보고 싶었다.
“우연히 남산 어린이 놀이터를 갔는데, 아이들이 놀아야 할 놀이터에 젊은 애들이 앉아서 담배 피우고 있는거예요. 그러니까 애들은 하나도 놀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가서 ‘저기 애들 노는 장소인데, 너희들은 다른 데 가서 담배 피우고, 저 애들 여기 와서 놀면 좋을 거 아니냐.’ 그랬더니 그 애들이 순순히 피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아이들보고 ‘야 니네 와서 이제 그네 타라’ 그러고, 줄 세워놓고 한 명씩 그네를 밀어주고, 시소도 같이 타고, 운동도 같이 하니 애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거예요. 그렇게 아이들과 놀아주니까 애들이 ‘형, 다음 주말에도 또 만나자’ 하면서 좋아하는 거예요. 그 바람에 남산 놀이터를 매주 토요일마다 찾아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놀이지도는 남산에만 머물지 않았다. 학생들은 효창공원과 장충공원, 사직공원까지 찾아다니며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았다. 놀이터는 학교 안에서 배운 체육을 학교 밖으로 가져간 첫 경험이었다. 공원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학생들의 교실이 되었다. 한번은 남산에서 놀이지도를 하고 명동 쪽으로 걸어 내려오는데, 학생들의 눈에 명동 YWCA 건물이 들어왔다.
그렇게 시작된 놀이지도는 남산에만 머물지 않았다. 학생들은 효창공원과 장충공원, 사직공원까지 찾아다니며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았다. 놀이터는 학교 안에서 배운 체육을 학교 밖으로 가져간 첫 경험이었다. 공원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학생들의 교실이 되었다. 한번은 남산에서 놀이지도를 하고 명동 쪽으로 걸어 내려오는데, 학생들의 눈에 명동 YWCA 건물이 들어왔다.
명동 YWCA
“우리, 저기 한번 들어가 보자.”
학생들은 평소 YWCA에서 체육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YWCA에서 뜻밖의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공원을 다니며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당시 연세대학교 한양순 교수는 학생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희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지금 공원에 나가서 청소년 놀이지도를 한다고 하니 ‘잘 됐다. 너희가 그런 것을 해야 되는 거다. YWCA는 여성들의 단체이지만 너희를 준회원으로 해주고 다음 주에서부터 축구공이고 배구공이고 스포츠 용품들을 모두 빌려줄 테니까 나가서 그 일을 더욱 활발히 해라.’ 하시더라구요”
학생들에게는 큰 힘이 됐다. 그때부터는 다음 주 공원에서 아이들과 어떤 활동을 할지도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동요에 맞춰 율동을 만들고, 새로운 놀이와 게임을 준비했다. 명랑운동회 같은 프로그램이 그 때 시작된 것이다. 매주 모여 준비하고, 현장에 나가고, 다시 모여 이야기했다. 공원에서 시작된 활동은 점차 모양을 갖춰 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경험은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지게 된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1969년, 유승희는 군 복무를 마치고 4학년이 되어 있었다. 그 무렵 그는 미 공보원 대학동아리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미 공보원에는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연극 동아리도 있었고 토론 모임도 있었다. 학생들은 강연과 발표회에 참여하며 새로운 문화를 접했고, 자연스럽게 다른 대학 학생들과도 교류했다.
“고목회도 그때 미 공보원 활동을 했어요. 각 대학에서 뭐 좀 하는 애들이 다 모이는 거예요. 거기 가면 공부도 되고 새로운 것도 많이 배우고 그랬어요.”
그 무렵 대학 동아리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화 한 편이 상영됐다. 영화의 제목은 《투 터치 어 차일드(To Touch a Child)》. 학교와 지역사회가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배우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었다.
“당시 저희가 방학 때마다 지방으로 체육계몽을 다녔거든요. 그 모습을 본 미 공보원 관계자분들이 ‘이 학생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지역사회학교 참여를 제안해 봐라’ 하고 판을 깔아주신 거죠. 영화를 본 우리는 ‘바로 이게 우리가 할 일이다’ 싶어서 ‘저희가 하겠습니다!’ 하고 흔쾌히 나서게 된 겁니다.”
고목회 학생들에게는 이미 공원에서 아이들과 뛰어놀던 경험이 있었고, 방학이면 체육 계몽 활동도 다니고 있었다. 영화 속 장면들은 그들에게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게다가 영화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던 체육교사 맨리의 모습은 학생들에게 더욱 낯설지 않았다.
“우리가 체육 동아리인데 저 체육 선생님이 하는 일이잖아. 우리가 해야 될 일 아니야?”
영화를 본 여러 대학 동아리들 가운데 먼저 손을 든 것은 ‘고목회’였다. 그렇게 고목회는 지역사회학교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이 처음 맡게 된 곳은 재동국민학교였다.
‘젊은 새이웃’의 탄생
대학을 졸업한 뒤 유승희는 YMCA 전임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관심은 여전히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있는 곳. 청소년들이 있는 곳. 그리고 지역사회가 필요한 곳이었다.
“YMCA에 가서 보니까 체육관도 있고 수영장도 있고 다 있는데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정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야, 이걸 지역으로 가지고 나갈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한 거지요.”
당시 YMCA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대상으로 스포츠 소년단 활동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이면 무료 수영교실을 열고 운동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문제는 늘 사람이 부족했다. 유승희는 자연스럽게 고목회 후배들을 떠올렸다.
“고목회 후배들한테 그러는 거예요. 야, 너는 수영 지도해라. 너는 지역사회학교 어디로 나가라. 너는 어린이들 놀이 지도해라.”
그러면 후배들이 또 현장으로 나갔다. 한 사람, 두 사람이 늘어나더니 함께 활동하는 학생들도 점점 많아졌다. 마침 지역사회학교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청년 지도자들을 위한 교육도 시작됐다. 그 무렵 1박 2일 일정의 청년지도자 훈련이 열렸다. 지역사회학교 활동에 참여하던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때 누가 그러는 거예요. 야, 너네들 동아리 이름 하나 만들어야 될 거 아니냐. 그래서 이름을 이것저것 내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지금 미국 LA에 사는 이종남이라는 친구가 ‘새이웃’이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름이 된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진 이름이 ‘새이웃’이었다. 이후 ‘새이웃’은 한국지역사회교육후원회 회보의 제목이 되었고, 대학생들의 모임은 ‘젊은 새이웃’이 되었다.
체육관의 불빛이 맺어준 인연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은 다시 체육관으로 모였다. 지역사회학교로 나갈 놀이와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토요일 오후만 되면 체육관에 모이는 거야. 밤마다 모여서 율동도 연습하고 놀이도 만들고 게임도 하고요.”
당시만 해도 대학 체육관에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는 일은 흔치 않았다. 밤늦게 학교를 둘러보던 총장의 눈에 체육관 불빛이 들어왔다.
“저 체육관은 왜 불을 안 끄나?”
총장이 직접 찾아간 체육관에서는 농구연습도, 배구연습도 하고 있지 않았다. 학생들은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만들고, 다음 주 아이들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총장님이 와서 보니까 희희낙락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다음 주에 아이들 만나러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일요일이면 학생들은 다시 학교에 모였다. 교정을 청소하고, 담배꽁초를 줍고, 때로는 재래식 화장실까지 치웠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일도, 학교를 청소하는 일도 학생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방학 때면 회원들의 고향으로 내려가 봉사활동을 하니 서울로 대학 보낸 부모님들의 자랑이 되었다.
그렇게 노란조끼를 입은 대학생을 눈여겨 본 당시 조영식 총장의 뇌리에는 ‘유승희’라는 이름이 깊이 각인된다. 이후 YMCA에서 지도자로 활동 중 유학을 앞두고 있던 유승희는 바로 경희대학의 석사과정에 들어감과 동시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유학을 가려던 길을 10년 후로 미루고 교수가 되었지만 아쉬움이 컸다. 가려던 학교(볼스테이트대학)에 직접 편지를 쓰고 수락을 받아 ‘스포츠 생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근육세포를 체취해서 그 사람의 근육모양에 따라 가장 적절한 분야의 운동선수로 키워내는 그런 분야의 학문이 없을 때였다. 마침 경희대학에는 의과대학이 있어 의대교수들과 공조하여 한국에서 최초로 ‘스포츠생리학’ 분야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학교를 넘어 지역사회로 – 사회체육운동의 선구적 역할
공원에서 시작된 경험은 YMCA와 지역사회학교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유승희는 체육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씩 넓혀 갔다. 체육은 선수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도 운동할 수 있어야 하고, 주민들도 운동할 수 있어야 했다.
“그때는 운동이라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만 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것은 아니거든요. 누구나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지요.”
그 생각은 이후 교수 시절에도 이어졌다.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그는 지역사회와 학교를 연결하는 일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다. 지역 주민을 위한 체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어린이 스포츠교실을 운영하고, 학교 시설을 지역사회와 함께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학교의 모든 교직원들도 매주 수요일에는 운동을 하나씩 하도록 기회를 넓혔다. 사회체육의 선구적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학생 시절 공원에서 시작된 문제의식이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는 바뀌어도 공동체는 살아나야
유승희 교수는 지역사회교육운동 역시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지역사회교육운동의 과제를 공동체 회복에서 찾고 있었다.
“옛날에는 학교를 이용해서 지역 주민들을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 게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잖아요. 도리어 되돌아가서 인간성 회복 운동을 해야 되는 것 같아요. 옛날에 새마을운동 할 때 이웃집 벽 허물기 운동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파트 앞집, 뒷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잖아요. 우리가 해야 된다면 그런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 같아요.”
그가 생각하는 지역사회교육운동의 출발점은 여전히 공동체였다.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인터뷰가 끝날 무렵 다시 남산 어린이놀이터 이야기가 나왔다.
“애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형, 다음 주일날도 또 만나……”
6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체육대학생은 교수가 되었고, 교수는 재단의 이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남산 놀이터의 아이들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유승희가 걸어온 길도 늘 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인터뷰 및 글: 김일규 | 사진: 이미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