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EF타임즈 인터뷰] 지역사회교육운동, 사람으로 이어지다…황명희 우리문화진흥원 이사장

일은 사람을 따라 살아간다

배우고 가르치며 이어온 42년, 지역사회학교는 나의 인생이었다.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아는 학부모가 학부모회를 함께 해보자고 했다. 사진 몇 장만 찍어주면 된다는 말에 따라나섰다가 학부모회

홍보부장을 맡았다. 당시 학교에서는 지역사회학교와 연계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황명희는 지역사회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학부모회장이 되었고, 그 활동

속에서 예절을 만났다. 학교에서 시작한 일은 어느새 지역으로 넓어졌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고, 함께 배운 사람들은 다시 지도자가 되었다.

그렇게 42년이 흘렀다.

황명희 원장은 지역사회학교에서 배운 것을 자기 일로 만들었고, 그 일을 다시 다음 사람에게 건넸다.

사진 몇 장 찍으러 갔다가

“어머니회에 회의가 있다는데 같이 한번 가보자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회 같은 치맛바람 일으키는 건 절대 안 하겠다, 그런 거 안 한다고 그랬죠. 그랬더니

제가 사진하는 걸 아니까 학교생활 하는 거 사진만 몇 장 찍어주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번 가보재요.”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사진을 취미로 하던 황명희 원장은 아는 학부모를 따라 신천초등학교 학부모회에 갔다. 사진을 찍을 줄 안다는 이유로 처음 맡은

일이 학부모회 홍보부장이었다.

당시 잠실 신천초등학교에서는 지역사회학교의 여러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학교 공간을 활용해 학부모들을 위한 교육이 열렸고, 학부모들이 학생이 되어 배우기도

하고,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다른 학부모를 가르치기도 했다.

황명희 원장은 각 프로그램을 사진으로 찍고 소식지를 만들면서 지역사회학교를 알아갔다.

“임원교육을 받았는데 그 교육이 제게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이 단체 참 좋은 단체다, 뭔가 해볼 만하다 생각했죠. 그런데 회장을 맡아달라고 하니까 자신이 없는 거예요.

회장 하기 전에 리더십 교육을 시켜준다기에 ‘안 하더라도 리더십 교육은 일단 받아보자’ 했죠. 교육을 받고 나니까 ‘이왕 할 거면 회장을 한번 해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홍보부장에서 학부모회장이 되자 직접 해볼 수 있는 일도 많아졌다.

당시 여성들이 운전면허를 따려면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다. 먼저 면허를 땄던 황명희 원장은 자동차학원과 협의해 학부모들이 저렴하게 운전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참여자가 많아지면서 운전면허 과정은 여러 프로그램 가운데 ‘히트 프로그램’이 되

었다. 자동차학원에서는 학교에 기부도 했다.

학교 도서관을 정비하는 일도 맡았다. 황명희 원장은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사서 과정을 밟아 사서 자격을 갖고 있었다. 사서 자격증이 있거나 도서관 일에 관심 있는 학부모들을

찾았더니 열 명 가까이 모였다. 이들과 책을 분류하고 도서실을 정비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필요한 일이 보이면 시작했다. 혼자 할 수 없으면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던 중 지역사회학교에서는 학부모들을 전문 지도자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부모역할훈련을 시작으로 새로운 지도자 과정이 이어졌다. 황명희 원장도 그 과정에 참여했다.

그 다음 만난 것이 예절교육이었다.

 

 

 

 

 

 

 

 

 

배우는 사람에서 가르치는 사람으로

당시에는 예절을 전문적으로 배울 곳이 많지 않았다. 지역사회학교가 예절교육을 시작하려 했지만 지도자가 될 학부모들이 체계적으로 배울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연결된 사람이 진민자 선생이었다. 당시 ‘청년여성교육원’에서 여성들에게 예절을 가르치고 있던 진민자 선생은 귀연회에 초청되어 우리 문화와 예절에 대해 강의를 했다.

“우리 문화가 왜 중요한가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제가 들어보니까 ‘야, 대한민국에 저렇게 똑똑한 여자도 있었어. 저기서 한다 하면 나도 해봐도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예절공부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귀연회는 지역사회학교에서 운영회장을 맡았던 학부모들이 자녀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든 모임이었다. 지역사회학교에서 훈련받은 학부모가

다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지도자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주성민이 미국에서 만났던 ‘스미스 부인’의 한국판인 셈이었다.

“처음 예절을 배우겠다고 청년원에 간 귀연회 식구들이 34명이었어요. 우리는 석

달만 하면 예절 강사가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해보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반은 그만두고, 남은 사람들은 계속 공부했죠. 선생님도 찾아다니고 모셔오고. 끊임없이 공부하다보니

우리가 성장을 한 거죠.”

첫해 예절교육에 참여한 34명의 교육비는 정주영 회장이 지원했다. 지역사회학교에서는 교장과 장학사를 대상으로 워크숍을 열었고, 이를 계기로 각 학교에 예절실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인사하는 법부터 한복을 입는 법까지 아이들이 생활에서 접하기 어려워진 것들이 수업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방법을 배워가고 그걸 평생 쓰잖아요. 인사는 한 번만 잘 배워놓으면 평생 쓰는 거거든요. 그래서 어렸을 때 인사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복을 입는 법도 아이들에게는 낯설었다.

“여자아이들한테 속치마를 갖다주면요. 어떻게 입는지 몰라 거꾸로 입어요. 그래서 한복 입는 방법, 한복이 왜 중요한지 그런 걸 가르쳐주는 거죠.”

예절교육은 교실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혼례와 성인식 등 한 사람이 태어나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며 만나는 통과의례로 관심이 넓어졌다.

미국에 사는 조카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황명희는 직접 ‘함’을 준비했다.

“그냥 축의금만 주는 것보다 뭔가 제대로 된 걸 해주고 싶어서 내가 남자 쪽 집이니까 함을 준비해 가지고 가겠다고 그랬어요. 우리 남편도 그 무거운 함을 어떻게 들고 가려고

그러냐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인간문화재한테 함을 맞춰놨었어요. 옛날 사람들은 함을 굉장히 신경 썼거든요. 내 아들의 가장 소중한 날 쓰는 거니까요.”

황명희에게 ‘함’은 물건을 보내는 상자만은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뜻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함을 달가워하지 않던 가족들도 직접 의례를

치르고 나서는 그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대단하다며 고마워했다.

예절에 대한 공부는 제례 연구로도 이어졌다. 황명희는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전통 제례에 대한 현대적 재조명’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 전통 제례를 오늘의 생활에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를 살핀 연구였다. 이후 보건사회부에서 지역사회학교로 연락이 왔고, 황명희는 현대에 맞는 제례 모형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그렇게 만든 모

형을 가지고 2년 동안 전국을 다니며 현대에 맞는 새로운 제례교육을 진행했다.

황명희에게 예절은 옛 형식을 그대로 지키는 데 머무는 일이 아니었다. 그 안에 담긴 뜻을 알고, 오늘의 생활에 맞게 이어가는 일이었다.

예절교육은 성인식으로도 이어졌다. 황명희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진행했던 한 성인식을 기억하고 있다.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성인식을 해주는데 처음에 청바지를 입고 왔던 애가 있었어

요. 성인식을 하면서 옷을 갈아입혀 주잖아요. 옷을 갈아입힐 때마다 애 모습도 달라지고, 완벽하게 우리 옷을 입혀놨더니 세상에, 청바지 입었을 때는 동네 깡패

 

같던 애가 선비 옷을 입혀놓으니까 진짜 선비가 되더라구요.”

그렇게 여러 차례 성인식을 치르면서 황명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조금씩 달라졌다.

“한복이 정말 싫다고 하면 양복을 입혀도 돼요. 여자는 투피스, 남자는 양복을 입혀도 되고요. 중요한 건 그 아이가 행복하고 만족하고 ‘내가 이 집에서 대단한 사람이구나’

라는 걸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거예요.”

예절교육을 하다 보니 차도 필요했다. 처음부터 차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차를 배우는 일이 어렵게 느껴졌고 차의 맛도 잘 몰랐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예절을 가르치

려면 차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도대학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차를 배우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저희를 사람 대접해 주셨잖아요

안양의 한 정보고등학교에서 예절교육을 할 때였다. 학교에서 모범생 10명과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학생 10명을 각각 교육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먼저 모범생

10명을 사흘 동안 가르쳤고, 이어 다른 10명의 학생을 만났다.

“모범생들을 먼저 했는데 자기소개도 너무 잘하고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다음 10명은 들어오는 걸음걸이부터 달라요. 발을 질질 끌고 들어오고, 내가 말하려고

그러면 자기네가 더 떠들어요.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이, 어떡하나’ 하다가 ‘얘들아. 차 한 잔 마시자’ 그랬어요. 예절교육을 딱 멈추고 찻상을 꺼냈죠.”

황명희는 준비한 수업을 멈추고 아이들 앞에서 차를 우렸다. 한 잔씩 건네자 조금 전까지 떠들던 아이들이 찻잔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차를 신경 쓰고 마시더니 ‘이거 뭐예요? 이거 뭐예요?’ 하고 질문을 시작하더라고요. 관심을 가진다는 거니까 소통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3일 동안 강의를 했는데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선생님을 더 만날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들 강의할 때 떠들기만 하더니 왜 나를 또 만나고 싶은데?’ 물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저희를 사람 대접해

주셨잖아요.’ 그러는 거예요. ‘언제 사람대접을 했는데?’ 했더니 ‘선생님이 두 손으로 저희들에게 찻잔을 주셨잖아요.’ 그러더라고요. 너무 감동받아서 제가 그날 울었다니까요.”

두 손으로 찻잔을 건넨 것은 황명희에게는 차를 대접할 때 늘 하던 일이었다. 아이

들에게는 그것이 ‘사람 대접’이었다. 그날 황명희가 만난 것은 예절의 형식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이게 차가 사람에게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소통하는 데 중요한 일을 하는구나 생각했죠.”

다도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는 초창기 예절지도자들도 함께했다. 이들은 공부를 마친 뒤 지역사회학교에서 차를 보급하고 전국에서 차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참여했다.

“차는 사람을 만나게 하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차 한 잔으로 추억을 만들고 감동을 주는 것 같아요. 너무 형식에 매여가지고 사람을 어렵게 하는 차보다 그냥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차를 해라. 저는 그렇게 얘기를 하죠.”

황명희에게 차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일이 되어갔다. 학교 안에서 아이들과 나누던 차 한 잔은 학교 밖 지역사회로도 이어졌다.

나라도 한번 해봐야 되겠다

다도대학원 동창이 기획한 문경의 첫 차문화제에 갔을 때였다. 문경새재에 차인과 도공, 주민들이 모여 찻자리를 펼쳤다. 마침 꽃비가 내렸다.

“주민들이 차 한 잔 마시면서 서로 나누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더라고요. 정말 화

합하는 자리였어요. 그런데 분당은 새로 생긴 도시라 문화 불모지잖아요. ‘분당에도 저런 거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 아무도 안 하는 거예요.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하니까 ‘나라도 한번 해봐야 되겠다’ 싶었죠.”

황명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행사 자체보다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새로 생긴 도시 분당에도 그런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차문화제를 한다고 그랬더니 우리 사범들이 깜짝 놀라면서 ‘선생님, 그걸 겁도 없이 어떻게 해요. 못해요’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왜 못하냐? 이제 한번 해보자’ 그랬죠.”

사람을 찾고 후원을 구했다. 대한주택공사와 한국토지공사 등 세 곳의 지원을 받아 첫 차문화제를 열었다.

2회부터는 성남시의 지원이 이어졌고 여성단체들과의 관계도 넓어졌다.

“나는 ‘내가 이거 못하니까 안 해야 돼’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어느 분야든 뭔가 자기가 할 수 있는 분야가 있어요. 내가 못하는 건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하면 되는 거예요. 제가 직접 뭘 하는 걸 잘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엮어내는 일을 좀 잘하는 편이에요. 하하하.”

돌아보면 처음 지역사회학교에서 활동할 때부터 그랬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사람을 찾고 함께 일을 만들었다. 예절과 차를 배우러 갈 때도 동료들과 함께 갔다.

나는 흘러갔지만 일은 살아간다

황명희가 분당에 문예원을 만든지도 30년이 되었다. 작은 공간을 마련해 예절과 차를 가르쳤다. 문예원에서 예절을 배운 사람들에게는 차 기초과정을 가르쳤다. 그 가운데

계속 공부하고 활동할 사람들은 지역사회학교의 지도자 과정으로 보냈다. 분당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시 지역사회학교의 지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배운 사람이 다시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황명희가 지역사회학교에서 교육받아 지도자가 되었던 것처럼, 자신에게 온 사람들에게도 다음 길을 열어주었다.

황명희는 사람을 키우는 것만큼 그 일을 다음 사람에게 이어주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저는 일을 하면서 적시에 사람을 키워 물려주는 일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안 되면 나 혼자 지지고 볶다가 끝나는 일인 것 같아요. 후임을 잘 뽑아서 그 일이 잘

진행되면 일이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요. 나는 흘러갔지만 일은

살아간다, 그런 생각을 해요.”

그가 말하는 ‘일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통해 일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자신이 배워서 시작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그 사람이 다시 누군가를 가르쳤다. 그렇게

일은 다음 사람에게로 이어졌다.

 

 

 

 

 

 

 

 

꾸준히 걸어온 42년

황명희 원장은 앞으로 지역사회교육운동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역사회학교 운동은 처음에 학교를 중심으로 대부분의 활동이 이루어졌잖아요. 그 지역이라기보다는 학교였어요. 그런데 이제는 지역공동체와 가정공동체를 살리는

일에 더 중점을 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때와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지역사회와 가정에서 필요한 일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 일을 이어갈 사람들에게 황명희 원장이 전하고

싶은 말은 ‘꾸준히’였다.

“‘그거 뭐 별 의미 없어’ 하지 말고요.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세월이 가야 길도 보이고 일도 능숙해지잖아요. 그래서 꾸준히 하면 안 되는 일이 없어요.”

황명희 원장 자신도 그렇게 걸어왔다. 사진 몇 장 찍어주러 따라갔던 학교에서 배우고 사람을 만났다. 필요한 일이 보이면 시작했고, 혼자 할 수 없으면 함께할 사람을 찾았다.

그렇게 42년이 흘렀다.

그 시간을 혼자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사람 사이의 일로 마음이 흔들릴 때는 곁에서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또 동료가

힘들 때는 제가 ‘내가 있잖아’ 하면서 붙들어주고 그랬어요. 그렇게 서로 끌어주고 힘이 되어주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지역사회학교가 울타리가 되어주고 서로가

동무가 되도록 해줬어요.”

 

 

 

 

 

 

 

교육을 받을 곳이 있었고 배운 것을 실천할 자리가 있었다. 곁에는 함께 갈 동료가 있었다. 황명희 원장에게 지역사회학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걸어온 울타리였다.

“지역사회학교는 나의 인생이었어요.”

황명희 이사장은 1982년 신천초등학교에서 지역사회학교활동에 참여하면서 운영회장을 역임했다. 예절지도자로 차문화 전문가로 성장하면서 1996년 지금의

성남시예절문화원(당시 문예원)을 설립했고, 2020년 사단법인 우리문화진흥원을 설립하여 현재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2019년부터 한국지역사회교육재단의

이사로도 참여하고 있다.

 

 

인터뷰 및 글: 김일규 편집국장 | 영상 및 사진: 이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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