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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원 칼럼] 이미지 문화

      전통적으로 역사학에서는 역사가가 자신의 견해를 포함하지 않고 오로지 역사적 사실들을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는 관점과 역사를 자신의 해석을 통해 재현시켜야 한다는 관점이 두 흐름을 형성해왔다. 레오폴트 랑케(Leopold Ranke)는 역사해석이 감정이나 주관적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한 드로이젠(Johann Droysen)은 역사란 객관적 사실로서 반복될 수 없으며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Carr)는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꼭 필요한 것이며 그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역사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사실과 해석은 분리될 수 없으며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역사가와의 대화라고 설명하였다. 역사적 사실은 기억을 넘어 기록되기에 역사적 사실이 없으면 역사적 해석이 허구가 되고 역사가의 해석이 없으면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 접할 수 없다. 둘 사이의 괴리는 사회적 혼란을 일으킨다. 카는 두 요소가 상호작용하고 올바른 역사가 정립되기 위해서는 진실성과 공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사실을 기록하는 역사가의 관점은 사회적, 문화적 또는 정치적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해석과 편견이 구분되어야 한다. 역사가는 객관적 연구, 비판적 분석, 경험적 증거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서술해야 한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란 표현을 통해 사실에 대한 해석은 기술되는 것이지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역사가의 해석은 주관적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여기서 주관적이라는 말은 배타성이 아니라 상대성과 관용을 의미한다. 배타적 역사기술은 역사성을 상실하는 사회적 위선이다.

 

      사이버문화가 이끌어가는 정보사회는 사실과 해석의 괴리를 심화하고 있다. 쟝 보들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정보사회를 원본 없는 이미지를 의미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s)’ 사회라고 규정한다. ‘시뮬라크르’는 실체가 투사된 이미지이지만 우리 시대에서는 실체를 압도하며 허구가 진실을 대체한다. 가상현실은 원본이 없는 이미지 문화를 끝없이 확장한다. 역사적으로 실체와 이미지의 관계는 헬레니즘 이후부터 철학의 주제였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실체로 보고 현실을 그것의 그림자에 비유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과학과 예술의 발전으로 실체의 복사가 가능해지고 실체와 이미지가 동일시되었다. 가상현실이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는 이미지가 실체보다 더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광고가 상품을 포장하고 SNS 이미지가 정체성을 나타내며 텍스트 대신 이모티콘으로 감정이 표현되면서 대중매체 이미지가 일상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는 정보사회에 살면서 역설적으로 정보에 차단되어 있다. 가상공간의 익명성 안에 은폐된 이미지가 실체를 형성하고 왜곡하는 현실이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졌다. 가상현실은 실체 없는 이미지이며 그것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익명성은 보이지 않는 권력을 형성한다. 권력은 도덕성을 약화하기에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권력에 있어서 도덕성이 배제되면 힘의 남용이 일어나고 사회질서가 붕괴한다. 사실을 왜곡하는 해석은 부도덕한 것이며, 역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도덕성은 합법성보다 상위개념이다. 정보사회에서 실체를 왜곡하는 이미지를 제어하는 유일한 수단은 법이 아니라 도덕적 자율성이다. 우리는 실체가 이미지 속에 은폐되고 도덕보다 힘이 지배하는 현실을 살아내고 있다.


홍순원 논설위원·(사)한국인문학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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