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개인이 사회에서 자립하고 성취를 이뤄내기 위한 ‘생존의 필수 도구’입니다. 어떤 언어를 어떻게 구사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과 사회적 위치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합니다.
과거 뉴욕에서 버뮤다로 향하는 크루즈선에서 목격했던 한 가지 강렬한 경험을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 다문화 가정이 당면한 언어 교육의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크루즈선의 위와 아래를 가른 언어 능력의 차이
화려한 뉴욕-버뮤다 크루즈선 내부의 풍경은 언어 능력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계급과 환경을 나누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축소판이었습니다.
선상 위, 쾌적하고 화려한 호스피탤리티 부문에서 고객을 직접 응대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필리핀 출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승객들과 소통하며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배의 가장 밑바닥, 엔진실 근처의 세탁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인도네시아 출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숨 막히는 소음과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묵묵히 고된 노동을 감당해야 했으며, 보수 역시 영어 구사자들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차이를 가른 것은 신체적 능력이 아닌, 오직 ‘영어(언어 능력)’ 실력이었습니다. 언어가 곧 생존 조건이자 기회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뼈아픈 현장이었습니다.
다문화 가정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언어의 격차와 위기
이 크루즈선의 현실은 오늘날 대한민국 다문화 가정이 마주한 상황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많은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이 언어 발달 지연으로 인한 심각한 사회 적응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그 원인의 중심에는 외국인 모친의 낮은 한국어 능력이 있습니다. 영유아기 자녀의 언어 발달에 가장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어머니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한국어 구사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자녀에게 올바른 언어적 자극을 주지 못하고, 이로 인해 아이의 한국어 능력이 떨어지는 ‘언어의 격차’가 대물림되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교우 관계에서 소외당하는 아이들은 점차 사회적 부적응의 늪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언어 장벽 때문에 우리 아이들을 사회의 가장 어둡고 고된 곳으로 내몰 수는 없습니다.
한국어 능력을 향상시킬 제도적·구조적 지원이 정답입니다. 이제 이 문제를 개별 가정의 책임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다문화 가정의 한국어 능력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촘촘한 제도와 구조적 지원이 국가적 차원에서 마련되어야 합니다.
첫째, 결혼 이주 여성들을 위한 체계적인 한국어 교육 인프라를 전면 확대해야 합니다. 단순히 문법을 배우는 수준을 넘어, 자녀 양육과 일상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부모 맞춤형 한국어 가이드’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둘째,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위한 영유아기 언어 발달 전수 조사와 조기 개입 시스템을 구조화해야 합니다. 취학 전 단계에서부터 언어 치료사와 전문 교사를 파견하여 언어 격차를 조기에 메워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할 때만큼은 출발선에서 동등한 언어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핵심입니다.
마치는 글: 포용적 대한민국을 위한 가장 확실한 주춧돌
언어는 사회적 생존을 위한 무기이자,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울타리입니다. 크루즈선 밑바닥의 찜통더위 속에서 묵묵히 일해야 했던 이들의 현실이 우리 다문화 가정 자녀들의 미래가 되지 않도록 조속히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다문화 가정을 향한 가장 시급한 복지는 그들이 우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한국어 능력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체계적인 제도적 지원을 통해 언어의 격차라는 높은 벽을 허물 때, 대한민국은 진정한 글로벌 포용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택호 前 안동MBC 사장
